“최민식 선배님과 호흡이요? 저 출세했죠.”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광녀(狂女) 한미녀를 내려놓고 ‘카지노’의 고구마 빌런 진영희 역을 열연한 배우 김주령(47)이 환하게 웃었다.
디즈니+ ‘카지노’는 카지노의 전설이었던 차무식(최민식 분)이 위기를 맞이한 후, 코리안데스크 오승훈(손석구 분)의 집요한 추적에 맞서 인생의 마지막 베팅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김주령은 극중 필리핀 한인 식당 고깃집 사장 진영희로 활약했다.
진영희는 필리핀에서 삼겹살 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교민이자 ‘마당발’ 호사가로, 그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사건의 계기가 돼 시즌2를 관통하는 스토리의 핵심으로 활약하는 빌런이다.
김주령은 이 문제적(!) 캐릭터를 마치 필리핀 현지에 실제하는 인물인 듯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처럼 그려다. 초면인 인물에게도 사람 좋은 미소보다는 툭툭 인사를 건네는 무심함을 통해 현실에 찌들대로 찌든 영희의 상황을 표현하는가 하면, 성나거나 긴장했을 땐 안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떠 영희의 불안감을 표현해 보는 이를 더욱 소름돋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시즌1에선 차무식과 카지노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다 보니 영희의 활약은 기대보다 적었으나 시즌2 들어 영희가 얽힌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김주령의 임팩트도 강렬했다.
“사실 진영희가 (살인을) 계획적으로 한 건 아니잖아요. 그냥 한 번 던져봤는데 돈(청부살인금)이 들어왔고, 돈 때문에 돌아버린 거죠. 평범한 필리핀 교민 아줌마인데 살인사건의 불을 지피게 됐단 점에서 매력적인 인물이었죠.”
김주령은 ‘카지노’를 통해 배우의 길에 접어든 지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경험했다. 그는 “늘 일하러, 촬영하러 해외에 가보고 싶단 생각이었는데 ‘카지노’가 내 꿈을 이뤄줬다”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해외 로케이션 촬영이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6시간 날아가서 짐만 내려두고 메이크업 하고 바로 현장에 투입됐죠. 그런데, 대본대로 안 하시는 거에요. 어, 이게 뭐지? 싶었죠.”
김주령은 “처음엔 적응이 안 됐는데, 배우들이 (카메라 안에서)놀 수 있게 일단 해주시는 게 감독님 스타일이란 얘기를 듣고 오케이 하고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더 재미있었더라. 상대 배우의 이야기를 더 집중하게 됐고, 특히 오달수 선배님이 너무 자유롭게 하면서 상황을 이끌어가주시니 이게 진짜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캐릭터인 진영희라는 인물을 어떻게 잡아갔을까. 김주령은 “타인이 나에게 침범하는 건 싫어하는데, 막상 자신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너무 관심이 있는 인물이다. 평범해보이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평범하진 않다. 마피아 보스를 남친으로 두고, 여자 혼자 타국에서 삼겹살집을 운영할 정도니”라고 소개했다.
필리핀 교민 특유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유튜브를 챙겨봤다는 그는 “감독님의 디렉션은 그냥 ‘진짜였으면 좋겠다’였다. 최대한 그 곳의 그 순간에 있으려 노력했는데 거기 사는 여자같아 보였다면 성공인 것”이라며 미소를 보였다.
차무식 역의 최민식과의 연기에 대해선 “내가 이번에 출세한 것”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영화 ‘특별시민’에서 최민식 선배님의 대변인 역할이었어요. 그땐 선배님과 말 섞을 일이 없었고 늘 따라다니는 수준이었는데, 이번에 대사를 나누며 ‘주령아, 참 출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주령은 “선배님은 모두에게 똑같이, 격 없이 대해주신다. 너무 좋은 분위기 만들어주신다. 그리고 내가 학교 후배라 그런지 눈이 한 번 마주치면 살짝 웃어주시는 것도 있었다”면서 “사석에서도 은근히 잘 챙겨주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실 선배님이 하신 작품이라 선택한 것도 있는데, 정작 몇 씬 안 만나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님이 연기하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곤 했는데, 그냥 차무식 그 자체시더라.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지? 싶을 정도였다”고 차무식에 빙의한 최민식을 극찬했다.
연극계에서 내공을 쌓고, 독립영화와 장·단편 영화, 드라마에서 역할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던 그였지만 불과 1년 여 전, ‘오징어 게임’으로 제대로 발굴된 ‘원석’이었다.
“‘오징어 게임’으로 가장 크게 바뀐 점은 김주령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게 됐단 점이죠. 그 이후 예전보다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돼 정말 감사한 작품입니다.”
김주령은 그러면서도 “‘오징어 게임’ 이후 여러 작품을 찍으며 정신없이 달리다가도, 책임감도 더 느껴지고, 부담감도 느껴지고, 혹은 또 나를 외면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잘 하려 하다 보니 힘이 들어간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연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시행착오 아닌 시행착오를 겪으며, 올해 내 목표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이제 시작이라 생각해요. ‘오징어 게임’은 끝났고, 배우 김주령으로서 나이와 상관 없이,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게 되요. 앞으로 정말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바느질하듯, 저의 속도대로 저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근육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는 그는 “학교 다닐 때처럼 연기 책도 보고, 배우 일지도 쓰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것을 다 무시하겠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쌓아나가자”는 것이다.
“제가 좀, (스스로에 대해) 의심이 많아요. 하지만 이젠 그러지 말고 나 자신을 믿고 가자는 생각을 갖게 됐고, 그래서 몸 근육만이 아니라 마음근육도 탄탄하게 가져가자는 생각으로 운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사실 운동을 진짜 싫어하는데, 매일 운동하는 나 자신을 보며 ‘너 진짜 절실하구나’ 싶더라고요.”
또 김주령은 “제가 또 남에겐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는데 정작 돌아보니 나한테는 안하더라. (정)호연이에게 ‘너 잘 될 거야’라고 그렇게 말해줬는데, 나 자신에게도 그런 얘길 좀 해주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너 좋은 배우야, 잘 하고 있어’라고 말이다.
미국 텍사스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남편도 김주령에게 큰 힘이 된다. “본인도 연출을 전공했다 보니, 예리하고 직선적으로 얘기해주는 게 있어요.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제가 물어보면 뼈아픈 지적을 해줄 때도 있는데, 제가 흔들릴 때 정확하게 잡아주는 든든한 사람이죠. 남편은 저의 연기에서도, 일상에서도 균형이 잘 맞으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주며 우아함을 키우면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 조언해주죠. 일상에서 저를 많이 건드려주는, 고마운 사람이죠.”
스스로에 대한 깊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계속 연기를 해올 수 있던 원동력은 특별하지 않다. 어쩌면 연기는, 그에게 ‘숙명’이었다.
“먹고 살아야 되니까.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하긴 했는데, 저는 제가 하는 거에 비해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뭔가 그만 뒀어도 될법한 이 의지와 정신상태로, 그런 상황이 몇 번 있었는데 그래도 크던 작던 나에게 기회를 주신 걸 보면, 결국 하늘이 ‘너는 이걸 해야된다’라고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거창하지만 (연기가) 나의 운명, 숙명으로 느껴졌죠. 지금은 흔들림 없어요. 끝까지 나아갈 일만 남았죠. 어려움은 늘 있는 거잖아요. 어려움이 와도 이제 더이상 의심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가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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